읽기/조르주 바타유

조르주 바타유, 『에로티즘』 (2장~4장)

eternephemere 2024. 8. 25. 19:52

작은 따옴표, 큰 따옴표 등 인용은 <조르주 바타유,『에로티즘』, 조한경 역, 민음사, 2009>를 참고.

슬래쉬(/~/) 표기는 다양한 이름으로 호명되는 개념들을 자의적으로 맥락에 따라 묶었다는 표시.

오른쪽 정렬된 글들은 해당 서적을 읽으며 별도로 생각난 작품이나, 보완가능한 내용을 따로 적어둔 것.

잘못 이해된 내용이 발견될 시 댓글 바람. 

 

2장

죽음과 금기의 관계

 

노동 또는 이성의 세계와 폭력 세계의 대립

'노동이 우리를 완전히 몰두케 하지는 못하'는 것도, '이성이 우리를 지배하여' (복종하고자 함에도 불구) '거기에 무한정 복종하는 것' 또한 불가능한 것은, 이성으로 전적인 통제가 불가능한 '충동'이라는 것이 자연계의 뭇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신을 끌고 와 우리의 이성과 동일선상에 놓고자 하는 비합리적인 예시를 끌고 오며, 우리 이성의 이러한 한계, 바꿔 말하자면 우리가 전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그러므로 자연스레 통제 역시 불가능할 수 밖에 없을) /폭력의/ 충동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는 결코 우리의 이성이 규정하는 합목적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p.45

 

* 칸트의 합목적성

칸트의 합목적성은 무언가 질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하나의 객체에 관한 개념은 그 개념이 동시에 이 객체의 현실성의 근거를 포함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 목적으로 여겨지며,

또 하나의 사물이 목적에 따라서만 가능한 사물들의 성질과 합치하면 그것은 그 사물들의 형식의 합목적성이라 일컬어진다

<판단력 비판>

 

이렇게 충동과 폭력이 이성을 지배할 때, 일명 소란스러운 과격 행위가 발생한다. 하나 노동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러한 '즉각적 만족'을 얻기 위한 예측불허의 충동이 아니며, 결과값이 일정할,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 행동이다. 이성을 발휘하여 스스로의 충동을 통제하라는 노동의 요구와 틀에 맞춘 인간에게는, 앞서 말한 충동에서 비롯된 '즉각적 만족'이 아닌 '차후 이득'이 보장된다.

 

다만 앞서 말하였듯 충동의 전적인 통제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바, 돌발하는 충동의 예방을 위하여 노동은 '태초부터 휴식을 수반했다'. 그렇다고 충동의 발현과 /충동의 일시적 억제인/ 노동을 대립적인 것으로 두고자 하는 것은 '독단'에 가깝다 이야기 하는데, 이는 노동이 '집단의 문제'라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할당된 시간 속에서 집단으로 이루어진 합의로서 노동을 하기에

즉흥적 충동의 '선동'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이야기일까?//

-> 노동 합리성은 자연지배를 위한 것이다.

내부적으로도 자연지배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즉흥적 선동이 불가한 것이다.

 

노동에 바쳐진 시간 동안 인간 집단은 요구된 합리성과 그로 인할 차후 이득을 위하여, 충동과 폭력에 저항한다. 돌려 말해 노동은 인간 집단을 금기로 묶게 되는 것이다.

 

"금기가 없다면 인간 집단은 인간 집단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 세계가 될 수 없을 것이다." p.46

 

근본적 금기 대상으로서의 폭력

 

"아이러니하게도 금기 규정을 지배하는 것은 변덕이다. 그리고 인간의 생활을 단호하게 가르는 분절점을 간명하게 확인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변덕이다. 변덕은 금기에 별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게 하기까지 한다." p.46

 

//이 '변덕'에 대한 이해가 더 필요. 이성의 전적인 통제 불가능성, 불안정성이라는 뜻인가?//

 

다시금 바타유 자신의 연구에서 금기가 관계되는 것은 '번식 행위'와 '죽음'이라는 점을 강조 하고, 사드를 인용.

 

금기

죽음 : "살인하지 말라"

성 : "육신은 결혼에 의해 완성에 이르니......"

('인간 세계를 영속시키기 위해 지키는 근본적인 두 가지 계율')

 

"번식을 낳는 극단과 죽음이라는 극단은 서로의 도움 없이는 이해될 수 없는 것들이다." p.47

(->자세한 이해는 앞선 장 참조.)

 

죽음과 관련된 금기의 선사 시대적 자료

가장 먼저 죽음과 관련한 것으로, 노동 인간이라 불렸던 네안데르탈인을 예시로 거론한다. 현 인류와 생김새도 많이 달랐기도 하거니와, 그들의 명확한 실상을 현재로서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다만 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노동을 했으며 폭력을 거부했다는 점'은 알 수 있다. 그들이 폭력과 충동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남긴 (노동을 위한) 석기, 그리고 무덤을 볼 때, 그것으로부터 부분적으로는 벗어나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중기 구석기 시대에 속하는 네안데르탈인 이전부터, 다시말해 전기 구석기 시대부터 해골과 두개골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죽음은 그때부터 이미 관심의 대상이자, 죽음이 불가사의하고 두려운 것이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하나 '종교적인 의식을 통해 매장하는 관습은 중기 구석기 시대의 말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재와 마찬가지로, '죽음과 죽은 사람에 대한 금기'는 그들에게도 분명히 작용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산 상태에서 시체(산 사람에게 죽은 다른 사람의 시체는 고통의 대상이다.)로 변해 가는 과정을 본다. 시체를 바라보는 사람에게 시체는 운명의 이미지이다." p.49

 

죽음과 폭력은 죽은 사람만을 파멸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산 사람 역시 파멸로 이끄는, '폭력의 증거'로서 거기에 남아 있다. 따라서 죽음과 시체에 부과된 금기는 사람들을 파멸에 잠식되지 않도록 붙잡아 두며, 멀리하게끔 만드는 역할을 한다.

원시인들이 확실히 폭력을 멀리하는, 저 스스로 폭력을 멀리할 줄 아는 합리적 존재였는가 하는 부분에 관하여, 그들이 전적으로 이성의 규칙에 근거한 것일 수 밖에 없는 도구를 사용했으며, (폭력 충동에 반하여) 노동을 행했다는 점을 근거로 한번 더 강조한다. 간접적 사료로만 남아 있고 이성에 관한 직접적 표현이 남아 있지 않다 한들 그것이 반드시 그들이 폭력적이었다는 증거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 '근대의 노동자라고 해서 노동자가 이성의 규칙을 말로 표현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표현만 없을 뿐 그들은 이성의 법칙을 충실히 준수하고 있다.' 자신들이 의식적으로 분명하게 일구어 낼 수 있는 노동이 있고, 그러한 이해와 의식을 훨씬 뛰어넘은 초월적인 죽음의 무질서가 존재했음을 그들도 느꼈고 그렇다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인류 혹은 인간은 노동의 질서에 몸을 담고 폭력을 금기를 과하며 멀리하게 되었다.

 

폭력의 전조, 폭력 만연의 위협으로서의 시체에 대한 공포감

폭력과 죽음이 가진 이중적 의미

1 : 생명의 애착과 관련된 공포감 때문에 그것에 가까이 가지 못한다. (멀리함)

2 : 그것이 지니고 있는 무서우면서도 불가사의한 것이 우리를 현혹한다. (가까이함)

 

"다만 내가 우선 지적해 두고자 하는 것은 죽음의 금기는 근본적으로 폭력 앞에서 물러섬의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p.51

 

폭력에 희생당하여 죽음을 맞이한 사람을 어째서 매장하였나? 그의 시체, 그 희생물이 또 다른 외부의 위협, 가령 동물들로부터 다시금 훼손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의미에서 매장을 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다만 매장의 의미를 반드시 거기에만 국한시킬 수 없다. 죽음은 한 사람을 시체/죽음/로 감염시키고도 계속해서 살아 있는 위협으로 남는다. 죽은 자를 파멸시켰을 뿐 아니라, 그 밖의 세상마저도 파멸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이자 죽음의 상징으로서 지속되는 것이다. ('불길한 운명의 이미지')

따라서 죽은 자를 매장했던 것은, 죽은 자를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죽음이 지닌 '감염의 위험성'으로부터 산 사람들을 멀리하고 보호하기 위함이다.

 

+ "죽음을 마법의 전염병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벌레가 득실거리는 시체를 보고도 질겁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옛날 사람들은 시체가 잘 건조하면 죽음의 순간에 찾아왔던 불길한 죽음의 폭력이 진정된 것으로 믿었다." p.52 (-> p.63 부패/끈적거림/의 가라앉음)

 

살해의 금기

프로이트 : 시체와 결부된 금기에 관하여 그는 만지려는 욕망과 대립된 것으로 정의함.  그러나 만지고자 하는 욕망이 오늘날보다 옛날에 특별히 강했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죽음에 침윤된 폭력은 한 가지 의미에서만 나쁜 유혹이 될 수 있는데, 바로 죽음의 폭력이 살아 있는 사람을 향해서 자행되거나, 죽이고 싶은 욕망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이다."
"폭력은 결과적으로 보면 마법의 행사와도 같지만, 기실 거기에는 항상 살해 책임자와 살해가 있다. 금기의 두 양상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우리는 죽음 또는 죽음에 깃든 광기를 피하려고 한다. 우리는 사람을 죽인 광적인 어떤 힘, 그리고 시체와 일체가 되어 광분하는,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그 폭력적인 힘을 방치할 수 없다." p.52~53

 

공동 사회 내에서 한 사람이 죽으면, 그 죽음의 폭력으로부터 구성원들은 멀리하고 싶어 있다(이성의 존속을 희망하기에). 하나의 죽음으로 인해 공동체가 금기의 느낌을 갖는 것이다. 그러한 금기는 공동체 내부에서 잘 작용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금기의 느낌은 내부 뿐 아니라 외부(인)에게도 잘 느껴지지만, 외부에서부터는 위반의 여지가 있다. 노동으로 인하여 합리적으로 구성된 경계에서 넘어가면, 그리고 그 경계가 잠시 해방된다면 금기 역시 위반되거나 해금되어 다시 폭력성을 띌 위험이 있다.

그러나 금기는 한번 위반되더라도 계속해서 남는다.

 

"금기는 뒤집혀도 조롱 당해도 위반 후에도 여전히 살아남는다. 아무리 잔인무도한 살인자라도 자신을 사로잡는 저주를 모르지는 않는다. 그에게는 저주가 영광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위반도 금기에 종지부를 찍을 수는 없다. 금기는 그것이 거부하는 것을 저주로 엄습하는 영광스러운 방법에 다름 아니다." p.53~54

 

두려움과 공포에 근거하여 금기가 생겨났다 한들, 우리가 반드시 그것을 준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금기가 생겨났을 당시에는 공포에 의하여 잠시 멀리하게 될지는 몰라도, 머지 않아 금기의 위반에 의해 확실시 될 '영광의 훈영'이 금기 주변을 맴돌게 되면서 우리는 현혹될 수 있다. 폭력을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은 없다. 금기조차도 말이다.

 

" "아무것도 방종을 억누를 수는 없다. ...... 방종자의 욕망에 불을 지르고 욕망을 다양하게 하려면 그를 제한하는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라고 사드는 말한다. " p.54

 

사드, 소돔의 120일

 

//충동을 촉발하는 원인이나 이유가 부재하고,

목적을 상실한 채 폭력에 대한 감각만 남아

충동을 실현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나타나는 폭력에 대해서 생각.//

3장

번식과 관련된 금기

 

자유로운 동물적 성생활을 거부하는 우리 안의 보편적 금기

지금까지 폭력/죽음/과 금기와의 관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성에 관련해서는 부차적으로 이야기했는데, 이는 남아 있는 사료의 문제 때문이다. 앞 장에서 이야기 했듯 죽음과 관련된 자료는 아주 오래전의 것도 남아 있는 반면에, 성에 관련한 것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덤은 이미 중기 구석기 시대부터 발견되는 반면, 원시인의 성행위에 관한 자료는 후기 구석기 시대까지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p.55) 

호모 사피엔스 시대에 '발기한 남성 성기의 모습' 그림이 나타나면서 성행위 역시 그들에게 주요한 관심사였음을 확인할 수는 있지만, 그러한 자료만으로 그것이 당시의 성적 자유와 반드시 관련된다고 단정짓기는 어려운 것이다. 다만 성행위 역시 폭력 그리고 죽음과 마찬가지로 노동의 대립 관계에 있다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성행위가 노동에 해를 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명확히 이야기할 수 있다. '노동 시간이 성행위를 제한했을 것이다.' 따라서 때와 장소에 따라 일정하게 정해진 규칙에 제한당하며 성행위가 이루어져 왔을 것이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그리고 성행위 앞에서 금기를 느끼는 동물이다.'

시대마다 성행위, 나체 등을 대하는 금기의 양태가 제각각 다르다는 점에서 성행위와 관련된 금기의 양상이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양상이 일정치 않고 불안정하기는 하나, 어쨌거나 공통적으로 성행위와 관련하여 우리를 구속해온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규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밖의 개별적인 것들은 부가적인 변형에 불과하다.

근친상간에 관한 개별적인 양상/금기/는 여태껏 보편적인 성행위의 금기와는 무관한 것으로, 집중적으로 다루어져 왔다. 다만 그것 또한 어떠한 양상에 불과하다. 바타유가 말하듯 우리가 고찰해야 하는 것은 '모든 시대, 모든 풍토의 (보편적이고) 종교적 금기들의 총체'이다.

 

"언제나 변함없는 '무형의 보편적' 금기에 대해 말하겠다. 금기는 형태도 대상도 변한다. 성이 문제되다가 죽음이 문제될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언제나 폭력이 관계한다. 폭력은 무서운 동시에 황홀한 것이다." p.57~58

 

근친상간 금기

근친상간 역시 성행위에서 파생된 개별적인 하나의 경우에 불과한 것이다. 다만 (성행위의 금기가 너무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그 총체를 단번에 파악하기가 어려웠던 반면) 근친상간의 금기는 보편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성행위를 대체할 수 있을 만큼 일반적인 금기로 무수히 그리고 자세히 다루어져 왔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고대의 가족 구조를 파헤쳐, 인간들을 동물의 자유와는 다른 규칙의 준수로 인도하는 막연한 그러나 근본적인 금기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원천적 특수성들을 찾아낸 데 있다. ... 레비스트로스는 근친상간의 금기가 언제부터 결혼 규칙의 양상으로 나타났는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데, 근친상간 금기의 의미를 거기에서 찾지 못할 이유가 없다." p.58~59)

근친상관과 관련된 금기는, 공동체의 질서를 뒤흔들 만한 폭력을 규칙으로 묶어둘 필요에서 생겨난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적절한 분배를 위한 규칙과도 관련될 것이다. 다시 말해 여자의 증여를 통해 (여성교환법칙) 분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양상으로서의 금기로 봐야 할 것이다.

다만 근친상간 역시 특수한 양상의 하나이기 때문에, 거기서 뚜렷한 금기의 원칙을 찾기는 어렵다. //한 지붕 아래의 사람과 성행위를 한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과 두려움, 그것에 대한 비인간적인 시선이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것 /유동성의 핵심/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 2부 연구 4로 이어짐.

 

월경과 출산의 피

월경과 출산의 피 등, 성행위/폭력/을 의미하는 '체액'에 관한 금기들도 존재한다. 

"체액은 폭력의 한 결과이다. 출산도 이러한 총체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출산 역시 그 자체가 이미 파열이며, 질서 있는 행동의 흐름을 넘쳐나는 과잉 아닐까? 출산, 그것은 존재에서 무로 변할 때 그렇듯이 무에서 존재로 변하는 과정에서 아무것도 피해 갈 수 없는 엄청난 의미를 갖는 것 아닐까?"p.61

이러한 체액에 대해 공포감을 느낀다 해도 의미가 없다. "우리가 다룰 것은 잘못 정의된 핵심 주변의 보조적 양상들이다." p.61

 

4장

번식과 죽음의 친화성

 

죽음, 부패 그리고 부활

금기는 일상의 폭력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폭력은 정확히 무엇인가... 폭력의 다양한 양상이 개진되고 나서야 그 통일적 의미가 파악 가능할 것이다.

 

근본적인 금기 두 가지, 바로 죽음/폭력/과 번식/출생/. 사실 생각해보면 이 두가지 /금기/ 역시 서로 대립되는 것이다. 다만 그 둘의 대립성을 잠시 제거하는 것이 가능한데, 바로 죽음과 번식을 서로 대립된 것이 아니라 순환하고 환원하게 되어 있는 서로의 전제 조건으로 삼는 것이다. 죽음이 출생을 예고하고, 출생 역시 죽음의 발생 조건이 된다. 따라서 하나의 생명은 다른 생명이 부패함으로 나타난 산물이며, 저 스스로 역시 결코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은 빈자리를 남기며, 죽음에 따르는 부패는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키는 데 필요한 물질을 순환시킨다." p.63

 

다만 아무리 그러한 대립적인 요소를 배제한다고 한들, 생명이 죽음에 대한 부정이라는 사실은 부득이한 진실이다. 무릇 생명이라면 죽음을 부정하고 그로부터 저항하기 마련이다. 이는 죽음 그리고 죽은 육체의 부패 /죽음과 소멸의 이미지/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막연히나마 죽은 사람의 부패에서 자신들을 향한 죽은 자의 원한과 증오를 보며, 장례식은 바로 그것을 진정시킬 목적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대신 해골이 완전히 육탈되면 그들은 비로소 안심한다." p.63

부패가 한창인, 구더기가 우글거리고 끈적거리는 죽음의 이미지가 가라앉으면 비로소 (여전히 고통과 죽음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 형세가 그나마 가라앉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사람들을 '끈적거림의 위협에 내던지지 않을 때' 부패와 죽음의 관계는 끝이 난다. 그러나 그러한 부패에 우리는 어째서 공포감과 함께 매혹을 느끼는가? 죽음에서 비로소 생명이 비롯된다는 사실. 그 나쁜 자연에서 우리가 비롯되고 머지않아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리라는 것. 세상은 부패에 다름 아니다. "그러한 구도 속의 공포와 수치심은 우리의 탄생과 죽음에 동시에 관련되어 있었다." p.64 이러한 징그럽고 공포스러운 /그러나 동시에 매혹적인/ 부패 덩어리는 뒤이어 이야기할 구토, 구역질, 역겨움 반응의 원천이다.

"죽음은 나라는 존재, 다시 존재하기를 기다리는 존재, 아니 존재를 기다리는 나를 예고하며, 그 감각 위까지 온전히 내리누를 미구의 소멸 너머 생명의 화농으로 내가 돌아갈 것임을 예고한다. 그렇게, 나는 내 안에서 구토의 승리를 미리부터 축하하는 창궐하는 화농을 예감할 수 있다." p.64

 

// 사르트르의 구토

물체가 포획되지 않는 것에 주목하여 해방된 존재의 우연성을 마주.

거기서 나타나는 기괴함과 부조리한 감정으로서의 구토.//

 

구토, 그리고 구토의 전체 영역

"기실 시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대상, 시체는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각인된다. 시체, 진중한 태도로 우리를 위협하면서 길게 누워 있는 그 시체에게서는 더이상 그가 살아 있을 때 우리에게 주던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다. 오직 두려움만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대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며 아무것도 아닌 것만 훨씬 못하다." p.65

 

이러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객관적이지 않은 혐오감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구토'와 같은 사람마다 다른 반응으로 나타난다.

시체 앞에서 느끼는 이러한 반응은, 배설물 앞에서 나타나는 반응과도 비슷하다. 그리고 성행위 역시 배설물을 배설한다. 우리가 수치스럽다 여기는 것에는 음부 뿐 아니라 배설물이 나오는 항문도 함께 포함된다. 그것들을 향한 우리의 반응이 죽음을 마주할 때의 우리의 반응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실제로 그것들이 물리적으로 인접해 있다는 (우연 같으나 마냥 우연 같지만은 않은) 사실로도 함께 묶인다. 따라서 죽음/부패/과 성행위와 배설물은 같은 범주 안에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들 앞에서 함께 혐오와 공포를 느낀다. 그리고 살아 있던 사람이 죽어 시체가 된 것, 거기서 느끼는 우리의 감정은 '텅 빈 어떤 것에 대한 감정이며 우리는 그것을 아득함 속에서 느낀다.'

시체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만, 거기서 악취가 나고 있음에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을까. 배설물 또한 마찬가지로, 그 악취가 우리를 역겹게 한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러한 악취에 대한 혐오적 반응이 태초부터 학습되어 온 것은 아닐까. 혐오감이라는 기이한 것은 우리가 폭력을 써서라도 가르쳐 온 것이다. '역겨움과 구토는 전체적으로 교육의 결과이다.'

그리고 앞으로 이야기 될 것은 공허에 관한 것이다.

 

생명을 낭비하고 싶은 충동과 그러한 충동에 대한 두려움

"예컨대 그 공허의 문을 여는 것은 죽음이다. 죽음은 부재를 시체 안에 끌어들이며 그 부재와 관계하는 것은 부패이다. (...) 죽음보다 더 깊은 공허를 내게 열어 보여 준다는 점에서 공포의 대상은 처음에는 내게 공포감을 불러일으킬지 몰라도 이내 나의 욕망을 충동질한다. / 일단 이러한 생각은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이성의 바깥 것)" p.66~67

 

"죽음은 곧 세상의 청춘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죽음만이 세상을 샘솟게 하고, 그것이 없이는 생명도 그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외면하려고 한다. 우리는 생명이란 것이 안정에 던져진 올가미라는 사실, 즉 생명은 온통 불안정, 불균형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소란스러운 충동이 끊임없는 폭발을 부른다. 그리고 폭발은 오직 한 가지 조건으로 이어진다. 폭발로 생겨난 존재들은 폭발의 힘이 다하면, 새로운 존재에 자리를 내주어 그 새로운 존재들이 폭발의 불꽃놀이를 지속하게 한다는 조건이 그것이다." p.67

 

자연이 우리에게 누리게끔 제공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두루 거치게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새로운 형태를 필요로 하는 만큼, 앞선 것을 다시 거두고 새로 올 것들에게 나누어준다. 기존의 존속보다, 헌것에서 새것으로의 대체를 선호하는 이러한 자연의 '낭비' 그리고 '사치 놀이'는 자연에서 흔히 그 과정을 발견할 수 있다. 죽음과 부패가 다른 더 커다란 새 생명을 위한 자양분으로 탈바꿈하고 그 새 생명이 또다시 먹히고 먹혀 가며 더 커다란 존재를 낳는 먹이 사슬의 형태. 

 

"이러한 먹이 사슬의 시각에서 보면, 생명을 낳는 과정이 비싼 대가를 치를수록 새로운 생명체의 생산이 많은 희생을 요구할수록 작업은 완벽한 것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간단히 생산하려고 하는 욕구는 초라한 인간성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생명이란 극도의 괴로움도 무릅쓰는 낭비, 견딜 수 없는 극도의 괴로움을 무릅쓴 극한 상황에서의 낭비를 간절히 욕구한다." p.68

+ <저주받은 몫>

 

절멸의 위기에 처한 극한 상황에서의 낭비를 욕구. (금기와 위반?) 그것을 희구하면서 느껴지는 만족감. 이 때 (//성 앞에서 초연하려는//) 윤리는 궤변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거부'의 몸짓

"결국 인간의 반항은 충동을 가속시킬 뿐이다. 즉 고뇌는 충동을 가속시키는 동시에 더욱 분명히 느끼게 할 뿐이다. 원칙적으로 인간은 거부의 태도를 취한다. 인간은 그를 사로잡는 충동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충동을 부채질할 뿐이고, 그럴수록 그는 더욱 혼미에 빠질 뿐이다." p.69

 

성과 죽음 등 기본적 금기가 결국 자연에 대한 인간의 거부로 보이게 될 것이다. 그러한 저항의 큰 틀에서 죽음과 성은 더는 구분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앞서 말하였듯, 자연은 존재의 지속 욕구를 거슬러 (절멸시키고 새것으로 대체하려는) 무한 낭비를 행사하고, 성과 행위는 그러한 무한 낭비의 감각을 느끼는 축제 와중의 최고조의 순간과 다르지 않다.

이렇듯 인간에게 보여주는 유사성을 이유로, 죽음/부패/과 성/성행위/는 우리에게 똑같이 반감과 구토를 일으킨다. 그 둘의 일관성을 느낄 수 있으며 느껴야 한다. 이따금 우리는 주어진 것(자연의 불가능한 것)을 단번에 얻게 된 줄로 알지면, 사실 그러한 파괴 작업을 부추긴 것은 배후의 자연이다. '자연은 모든 존재로 하여금 포기하기를 요구하며, 더 나아가 그 죽음의 축제에 몰려들기를 요구한다.' 그러한 죽음의 축제, 혼미에 휩싸여 있더라도 그것을 부정할 수 있을 때, 인간의 인간다움은 가능해진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분명히 거부를 표시한 적이 없다. 다만 기력이 다했을 때 자연의 충동에 동조할 뿐이다. 

 

이제 금기 너머에 도사리는 위반을 고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