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역시 '특권적 상태'이다. 출생은 태어나는 이에게 있어 '특권적 상태'가 될 수 없다. 의식이 관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스스로의 죽음을 바라볼 수 있으며, 이에 대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스스로의 출생을 바라볼 수는 없다. 우리들은 태어날 적에 단지 물체에 지나지 않았으며, 우리들은 출생을 스스로의 사건으로서 거론할 수가 없다. 그것은,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만 사건일 수 있다. 그것이 당사자에게 있어서 사건이 될 수 있는 것은, 후년에 스스로의 출생을 과거의 일로서 회고할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이다. 그때, 우리들은 그것이 어떠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던 주변 사람들과 교류함으로써 비로소, 그것을 스스로의 사건으로 이루어낸다. 사생아는, 불편해 하는 어머니의 표정, 혹은 무슨 의미라도 담겨 있는 듯한 세간의 대우에 의하여 비로소 사생아가 된다. 즉, 스스로의 출생이 하나의 사건이 되는 것이다."
7-8p.
"애정은 배반되고, 증오는 조정되며, 비애는 위안되고, 환희는 방해된다. 상대가 없으면 애증도 발생하지 않지만, 상대가 있기에 애증은 완성되지 못한다. 방해하고, 물을 끼얹는 자가 반드시 나타난다. 아버지의 병상에서 스스로의 비애를 완전히 퍼올리려 준비하던 소녀의 앞에, 절제 없이 울어대는 숙모나 어머니가 있다. 잔디 위에서 입맞춤이라는 의식을 완성하려 했던 여자의 밑에는, 매정한 쐐기풀이 있었다. 게다가, 스스로의 역할을 이해하고 협력해주지 않는 애인이 있었다."
11p.
"역할을 잘못 맡거나, 상대 역할이나 구경꾼에게 교제를 무리하게 강요하거나, 결단이 나야 할 때에 결단이 나지 않거나, 자기 혼자서 연극을 하거나, 너무 이르게 나와버리거나, 퇴장을 잊어버리거나, 구경꾼의 반응을 무시하거나, 구경꾼이 원치 않는 연극을 하거나. 모든 것은 그런 모양새다. 누구든지, 어떠한 역할을 연기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상대에게도 어떠한 역할을 연기하도록 만들어야만 한다. 때로는, 무대에서 내려와 객석에 앉는 일을 용인해야만 하고, 자기 스스로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
무대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들은 많든 적든 자기를 위장해야만 한다. 참지 못하겠군, 이라 청년이 말한다. 자연스레 자기를 행동하고, 개성을 늘일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제각각의 개성을 자연스레 살리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그저 '청춘의 개성'이라는 흔해빠진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렇게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개성 같은 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 설령 그런 게 존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가 연기하고 싶은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그 밖은 모두 생리적인 것이다. 오른손이 길다든지, 허리 관절이 발달되어 있다든지, 냄새를 잘 맡는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또한, 인간은 자유에 대해서 잘도 떠든다. 거기서도 사람들은 착각을 하고 있다. 우리들이 실로 원하고 있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우리들이 바라는 것은 어떠한 일이 일어날 법하기에 일어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등장하여 특정 배역을 맡고, 해야만 하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실감이다. 우리는 뭘 해도 좋고, 뭐든지 가능한 상태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역할을 연기해야만 하고, 그 역할을 집어던지면, 그 밖에 지장이 생기고, 시간이 정체된다. 바라는 것은 다만 그러한 실감이다. 우리들이 자유를 바란다고 하는 착각은, 자연스레 산다는 리얼리즘과 관계가 없지 않다. 타인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고 무대 위에서 쾌감을 안겨주는 것은, 개성이 아니라 역할이며, 자유가 아니라 필연성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보람은, 필연성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실감에서 발생한다. 그 필연성을 맛보는 것, 그것이 산다는 보람이다. 우리들은 이중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배우가 무대 위에서 늘 그렇게 살아가고 있듯이."
16-17p.
"극에서는 모든 것이 연쇄반응처럼 연달아 일어나야만 하며, 그리고 그것을 일정한 미래를 향하여 질질 끌고 가는 강제적 수법이 눈에 보여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연쇄반응은 엉터리여서는 안 된다. 현재는, 한 순간 한 순간, 온갖 방향을 향한 가능성을 품고 있으면서도, 거기에는 의연하게도 법칙이 있다. 극의 진행과 함께 퇴적되어 온 현재는, 그 스스로를 완전히 연소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한 필연성은 굳게 지켜져야만 한다. 현재는 우연의 귀결이며, 우연의 가능성을 품으면서, 게다가 막의 끝에서는 모든 것이 고도의 필연성을 가지고서 되살아난다.
배우의 대사는, 희곡 속에서 주어져 있고, 결정되어 있다. 그의 행위에는 추호의 자유도 일탈도 허락되지 않는다. 어떠한 세부사항이라도, 마지막까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 미래는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미 미래는 존재하고 있음에도, 게다가 그는 그것을 미래에서가 아니라 현재로부터 이끌어내야만 한다. 그는 지금 무대를 가로지르고자 한다. 중간에 샘이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는 샘에 가까이 다가가서 물을 마신다. 이 경우, 알아차리는 순간이 문제가 된다. 알아차리게 만드는 것이 샘이어서는 안 된다. 알아차리는 것은 바로 그이다. 그가 알아채는 순간까지, 샘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
이미 결정되어 있는 행위나 대사를, 배우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처럼 신선하게 행하고, 신선하게 이야기해야만 한다. 여기서도 이중성이 문제가 된다. 희곡 속에서 정해져 있는 행동이나 대사는, 이미 존재해 있는 것이다. 관객 중에는 그것을 이미 읽은 적이 있는 사람도 있을 테고, 두번째로 보는 사람도 있을 테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것을 처음 보는 것으로서 향수(享受)하고 싶어한다. 그러기 위해서 배우는, 시선을 미래를 향해 두어서는 안 된다. 현재를 미래에 봉사시켜서는 안 된다. 그는 현재에만 몰두한다. 연극을 마지막까지 알고 있으면서도, 더 나아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배우의 이중성에서, 의식은 대체 어느 쪽에 있는 것일까. 연극의 줄거리나 대사를 마지막까지 알고 있는 것은 의식의 세계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을 테다. 그것은 단순히 기억의 문제이며, 의식을 불태우는 재료에 지나지 않는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 거기에 비로소 강렬한 의식의 행위가 요구된다.
그는 미래를 불가지한 것으로 포착함으로써, 또 과거를 불가역한 것으로 포착함으로써, 현재를 탐욕스레 마셔버리고자 한다. 주어진 조건 속에 있는 스스로의 육체와, 그것을 객체로서 맛보며 그 조건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의식, 거기에 배우의 이중성이 있다."
19-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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