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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중] 미셸 레리스, 『게임의 규칙 1 - 말소』 중 일부

번역 : 박지우(eternephemere) 미셸 레리스,『게임의 규칙 1 - 말소』 Michel LeirisLA RÈGLE DU JEU, Ⅰ, BIFFURES 「…행이다!」 방의 그 무정한 바닥 위에 (손님 맞는 방이었나? 밥 먹는 곳이었나? 칙칙한 당초무늬가 들어간 붙박이형 카펫이었나, 아니면 아무래도 좋을 문양으로 그 속에 여러 가지 궁전이며 풍경, 대륙 들을 그려 넣어 말 그대로 내 유년기의 만화경이었던, 그 안에 환상 속 건축물들을 여기 놓고 저기 놓아 보았기에 당시에 그 어떤 책을 넘겨 보아도 펼쳐지지 않았던 천일야화의 바탕천이 되어주었다고 할 수 있을 깔개형 카펫이었나? 아니면 왁스 칠한 맨 마룻바닥? 거기 바탕색보다 짙게 그어져 있는 나뭇결들은 뻣뻣이 검게 패인 홈을 따라 반듯하게 나뉘어..

후쿠다 츠네아리, 『인간, 이 극적인 존재』 (福田恒存、『人間・この劇的なるもの』、新潮文庫、昭和35年)

"죽음 역시 '특권적 상태'이다. 출생은 태어나는 이에게 있어 '특권적 상태'가 될 수 없다. 의식이 관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스스로의 죽음을 바라볼 수 있으며, 이에 대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스스로의 출생을 바라볼 수는 없다. 우리들은 태어날 적에 단지 물체에 지나지 않았으며, 우리들은 출생을 스스로의 사건으로서 거론할 수가 없다. 그것은,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만 사건일 수 있다. 그것이 당사자에게 있어서 사건이 될 수 있는 것은, 후년에 스스로의 출생을 과거의 일로서 회고할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이다. 그때, 우리들은 그것이 어떠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던 주변 사람들과 교류함으로써 비로소, 그것을 스스로의 사건으로 이루어낸다. 사생아는, 불편해 하는 어머니의 표정, 혹은 ..

읽기 2026.03.05

[번역] 오가타 카메노스케(尾形亀之助), 『색유리의 거리色ガラスの街』 초역(抄譯)

尾形亀之助、『現代詩文庫1005・尾形亀之助』、思潮社、1975年번역 : 박지우(eternephemere) 환한 밤 한 사람 한 사람이 과연 조화(造花)와도 같고손은 부드러이 부풀어 오르고보들보들 밤 공기가 후끈해진다 담배와뜨거운 차와 이건ー카스테라처럼환한 밤이다 15p봄(봄을 맞아 나는 상쾌히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나는 스스로를 사랑한다한 없이 사랑하는 중이다 이토록 화창한봄ー나는 하늘만큼 커다랗게, 활짝 눈을 떠 보고 싶다 그리고서재는 내 손톱만 한 크기도 되지 않아손바닥에 봄을 얹고서당나귀를 타고 거리로 나서고 싶다 17p밤의 정원에 떨어진 담배꽁초 밤바람이 조금 불길래나는 그만 이층 창문에서 버렸던 담배꽁초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ーーーーーーーー 정원에 쥐똥을 묻었더니 콩이 자라고이..

[번역] 드니 디드로, 『1759년 살롱』

번역 : 박지우(eternephemere) (Remerciements spéciaux à 柴田空大)2025/11/26~2026/3/5 그림은 주로 다음 링크에서 참조하였다 : https://utpictura18.univ-amu.fr/serie/paris-salon-17591759년 살롱드니 디드로 "안목도 분별도 없는 우리 저널리스트들이 올해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에 전시된 그림들을 두고서 온갖 찬사를 늘어놓은 뒤이니 만큼, 해당 전시에 관하여 막연하지 않고 보다 공정한 인상을 품게 된다 한들 개의치 않으실 줄로 압니다. 이어서 읽게 되실 글은 저에게 부쳐진 것이나, 이러한 주제로 제가 쓸 수 있었을 그 어떤 글보다도 더 큰 즐거움을 가져다 드릴 것입니다."그림Grimm* 서간, 1759년 11월 1일..

202602 <로제 질베르-르콩트의 '변모'의 양상>

이제는 기억도 잘 안나지만, 지금보다 더욱 아무것도 모를 시절, 프랑스의 이런저런 시인들을 인터넷으로 찾아보던 와중에 발견하게 된 시인이 바로 Roger Gilbert-Lecomte였다. 역본은 물론 관련 연구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말 그대로 아예 존재조차 잊힌, 프랑스문학사에 그 어떤 족적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시인. 바로 그러한 마이너리티에 끌리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처음 읽었던 그의 시에서 느껴지는 온갖 자기파괴, 삶도 죽음도 아닌 공간의 추구, 시니컬과 유머가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끌렸다. 그래서 뭔지는 몰라도 문학 번역에 관하여 연구하겠다는 당초의 결심은 전부 다 내던져 버린 채 르콩트, 오직 르콩트라는 시인을 파고들고자 마음을 먹었다. 그게 바로 (앞으로 어떤 미래가 다가올 지 짐작도 못..

[번역] 토미나가 타로(富永太郎) / 생전 발표작품 전편

富永太郎、『現代詩文庫1006・富永太郎』、思潮社、1975年、8−17頁번역 : 박지우(eternephemere) 다리 위의 자화상 오늘 밤 나의 파이프는 다리 위에서광포히 연기를 상승시킨다. 오늘 밤 물에 잠긴 저 바닥짐*들은모두 승천해야만 한다,수건 둘러쓴 뱃사공들을 태우고서. 전차 여러 대가 꽃수레*의 망령처럼소리도 없이 밤 속의 확장을 이루어낸다.(신을 신고 목교를 밟는 쓸쓸함!) 나는 명멸하는 '은단'* 광고탑이 밉다.또한 모든 앤솔로지*며 칼피스소다수*가 싫다. 불쌍한 욕망과다증 환자가인류박멸이라는 큰 뜻을 품고서,맞이할 최후가 임박한 밤이다. 나방아, 나방아,가드*의 쇠기둥에 멈추어, 떨고서,무수히 산란하고 죽으려무나, 죽으려무나. 활짝 피어난 파출소의 적색 램프는너를 간호하기에는 과분하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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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원 목련이갈변하는 건 숨을 쉬기 때문이야, 목련이짓무른다 제각기 떨어져 펼쳐졌던 하얀 병상 휠체어 삐걱이며 창 밖이눈더미의 검은 짓이김을 몇 번 더 반죽해야계절은 바뀌는 거야, 라는가설 속의 아이에게 짐짓발음해보는 불가능한 사계절 목련과 수련과 애련과 가련 어떤 말놀이는 꽃에서슬픔으로 순환하기도 침범하기도 한다철썩 같이 믿던바보 같은 아이 나올 줄 모르는 너를 위해 밖에 나가 언젠가 한 약속 목련을 흔들고 폭설을 쓸어서 보여줄게 축축한 주머니가갈변한 병상으로 두툼해지고 질답한다, 검은 짓이김을몇 번 더 반죽해야 밖으로 나옵니까쩔뚝임을 멈추고 너는가던 길을 마저 가야 할 것 같다고 세월과 무릎을 털고 일어서며

쓰기 2026.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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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메이트 하느님, 천칭에 죄를 올려두는 소리가 당사자인 저에게까지 들려옴은 누구의 탓입니까 행갈이를 두려워 하다 계단을 껑충껑충 뛰어넘는 꿈을 꾸는 시인의 괴로움은, 그 소리를 속절없이 듣고만 있어야 하는 야간 수위의 외로움은, 한낱 악몽을 길몽으로 와전해야 하는 해몽꾼의 의무감은 얼마나 많은 인칭을 더 삽입해야 끝이 나는 연극입니까 분扮해야 할 배역을 취사선택하고 있었건만 참다 못 한 하루가 억지로 막을 내립니다 세계의 암전도 생체의 암전도 아닙니다 이렇게 감정은 매번 시기상조이거늘 육체는 와신상담을 핑계로 몇 분 몇 초를 더 지연되어야 제 몫을 다 합니까 눕더라도 앉더라도 서더라도 용서받지 못하고 용서받을 필요도 없는 이곳은 어디입니까 아니 누구입니까 혼자라는 값에 도달하기 위하여 서투른 주먹구구로..

쓰기 2026.01.09

[감상1] 플리퍼즈 기타, 「러브 앤 드림 또 한 번」 (フリッパーズ・ギター、「ラブ・アンド・ドリームふたたび/Love and Dreams are Back」, 1990, 2006)

ラブ・アンド・ドリームふたたび / Love and Dreams are Back러브 앤 드림 또 한 번 / Love and Dreams are Back(수록된 앨범 『CAMERA TALK』은 본디 1990년 작품이나, 해당 곡은 2006년 재발매 리마스터에만 수록되어 있다) フリッパーズ・ギター플리퍼즈 기타(Flipper's Guitar) パレードのトロンボーンと/撃つためのドライフルーツ퍼레이드의 트럼본과 / 쏴서 맞추는 드라이후르츠あやふやで/見栄ばかり張る/僕たちのドーナツトーク애매모호해서 / 허세만 잔뜩 부리는 / 우리들의 도너츠 토크髪をながく伸ばしてみて/元には何も戻らないと知るはず머리를 길게 길러 봐 / 원래대로 돌아가는 건 하나도 없다는 걸 알게 될 걸意味のない言葉を繰り返すだろう/向こうの見えない花束のよう의미 없..

듣기 2026.01.09

[번역] 미셸 랑돔, 「로제 질베르-르콩트 : 과장의 극치」

Michel Random, Le Grand jeu essai, Éditions Denoël, 1970, 91-95p.번역 : 박지우(eternephemere) 3. 로제 질베르-르콩트 : 과장의 극치 (3. ROGER GILBERT-LECOMTE. LE SOMMET DE L'HYPERBOLE) 마치 수정을 깎듯 고되면서도 굳세게 운명을 쌓아나가는 르네 도말에 비해, 로제 질베르-르콩트의 운명이란 그와는 정반대로, 갈수록 심오하며 어둡고 불길한 길을 파내려 간다. 르콩트를 사로잡는 것은 의식이나 인식이 아니며, 그에게 살아간다는 것이란 어딘가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일이며, 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서 세계 자체를 거부하거나 그에 맞서 반항하는 일이다. 그의 운명이 기도(企圖)하는 바는..